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㉝ 이동통신 1천만 돌파했으나 ‘풍요속 빈곤’…新 브랜드 ‘SKY’ 탄생 [김문기의 아이씨테크]


[다시 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6부. 이동통신, 혼돈의 세기말

우리나라가 정보통신강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첫발인 한국전기통신공사(KT), 한국데이터통신(LGU+), 한국이동통신서비스(SKT)가 설립된 지 꼬박 4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간 이동통신 역시 비약적으로 성장해 슬로우 무버에서 패스트 팔로우로, 다시 글로벌 퍼스트 무버로 도약했습니다. 5G 시대 정보통신 주도권 싸움은 더 격렬해졌고, 다시 도전에 나서야할 절체절명의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과거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부족하지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동통신 연대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담긴 독자의 제보도 받습니다 [편집자주]

2016년에 출시된 스마트폰 스카이 아임 백(IM-100). SK텔레콤이 1998년 세운 SK텔레텍의 첫 단말의 이름도 IM-100이다 [사진=정소희 기자]
2016년에 출시된 스마트폰 스카이 아임 백(IM-100). SK텔레콤이 1998년 세운 SK텔레텍의 첫 단말의 이름도 IM-100이다 [사진=정소희 기자]

[아이뉴스24 김문기 기자] 1997년 3월 24일.

한국이동통신 잠실 올림픽 공원 내 역도경기장에서 신 CI 선포식을 갖고 SK텔레콤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선포식에는 최종현 SK그룹 회장뿐만 아니라 손길승 부회장 등 2천800여 임직원이 함께 했다.

최 회장은 “새로운 CI도입을 계기로 올해를 경영혁신의 원년으로 삼아 제2의 창업을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경영에 임하고, 앞으로 SK텔레콤이 세계 각지에서 친근하고 강한 이름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구성원 모두 실력을 쌓아 경영활동에 임해줄 것”을 당부했다.

이 하루를 위해 SK텔레콤 실무 TF와 홍보실 사무국 직원들은 장장 10개월이라는 시간을 투자했다. 당시 사보인 ‘SK월드’에 나선 이원재 전무에 따르면 선포식 행사 준비만 2개월, 12시 이전 퇴근하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역도경기장 공사로 인한 복구,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환경보호 차원에서 일회용 도시락 반입을 금지하자 재활용 가능한 도시락을 3일동안 준비한 노력 등이 더해졌다.

SK텔레콤은 사명 변경에 따라 세계 20위 종합정보통신사업자를 목표로 했다. 온라인사업과 케이블TV,콘텐츠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고 수출을 통한 글로벌 기업 성장을 도모했다. 고객만족경영 10대 과제를 수립하고 고객 확보에도 만전을 기했다.

1998년 1월 5일까지 이후 SK그룹은 모든 관계사의 CI를 바꿨다. 45년간 정들었던 ‘선경'이라는 이름을 뒤로하고 ‘SK’로 새출발을 알렸다. 현재의 SK텔레콤이 자리할 수 있었던 순간이다. 그리고 이 해는 최종현 SK그룹회장이 다시 올 수 없는 먼 길에 오른 때이기도 하다.

◆ 암울한 시작

1998년은 이동통신 업계에서는 찬바람이 불던 때다. 정보통신업계 시장개방 원년의 해였던 그 때는 외국 통신사업자가 국내 통신업체 지분을 33%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외국 자본으로 인해 국내 통신업계의 주도권이 뺏길 판이었다.

또한 IMF 사태로 인한 내수 경제와 소비 위축으로 인한 앞날을 예견할 수 없게 됐다. 가령, 한국통신프리텔은 지난해 9천억원을 투입했으나 1998년에는 2~3천억원으로 투자 규모를 줄었다. 한솔PCS도 9천억원을 투자했으나 당초 5~6천억원에서 2천억원으로 내렸다. LG텔레콤 역시 8천억원을 투자하고 3~4천억원을 더하려 했으나 2천700억원으로 맞췄다.

조직개편을 통해 인력 감축도 병행됐다. 감원한파에 따라 이동통신사 직원들이 우후죽순 자리를 떠났다.

경제상황뿐만 아니라 정치상황 역시 엄중했다. 김영삼 정권이 떠나고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던 시기다. 김영삼 정부 하에 추진된 PCS 사업자 선정 의혹이 도마 위에 올랐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기간통신사업 전반으로 감사원 특감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출국해 미국 하와이에 체류 중인 이석채 전 정보통신부 장관을 소환조사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정치적 리스크는 사업자들을 더욱 위축시켰다. 조사 결과에 따라 사업의 운명을 갈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새로운 정부가 바라보는 기간통신사업에 대한 시선이 따까웠다. 이동통신 5개 사업자가 각각의 투자비를 집행하는데 따른 중복투자 문제와 공급과잉에 따라 낭비되는 재원들이 상당했다고 판단했다. 가시적으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1월 23일 이동통신 5사를 불러 구조조정 필요성을 강조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업계는 뒤숭숭했다. 인수합병에 대한 여러 시나리오가 오갔다. 실제적으로 그 해 정부는 이동통신 사업자간 인수합병의 문턱을 낮추기도 했다. 도태된다면 자연스럽게 흡수돼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그러다보니 여러 억측이 제기됐다. LG정보통신 장비를 주로 구축한 SK텔레콤과 LG텔레콤이 합병된다던지, 기지국 공용화를 추진 중인 한국통신프리텔과 한솔 PCS가 결합할 수도 있고, 또 신세기통신이 LG텔레콤으로 넘어가면서 데이콤과 하나로통신을 품을 수도 있다는 설이었다.

2G폰 [사진=LG유플러스]
2G폰 [사진=LG유플러스]

◆ 외형 성장 대비 부실한 내실

물론 걱정과 달리 통신시장은 빠르게 성장했다. 상용화에 나선 1997년말 PCS 사업자의 가입자수는 100만명을 돌파했다. 1998년 6월 19일에는 이동통신 5사를 통한 이동통신 가입자수가 1천만명을 돌파했다. 이같은 결과는 안팎의 리스크와는 별개로, 또 IMF 한파에 따른 영향에도 변함없는 수치여서 더 놀라웠다.

1위는 SK텔레콤으로 513만명의 가입자를 유치하면서 점유율 51.1%를 기록했다. 2위는 신세기통신으로 150만명의 가입자를 가져와 14.9%를 차지했다. 그 뒤를 한국통신프리텔이 추격했다. 13.2% 점유율로 133만명을 모았다. LG텔레콤도 12.2%로 123만명을, 한솔PCS는 87만명으로 8.6%를 기록했다.

다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왜곡된 시장이었음을 드러낸다. 이동통신 5사의 치열한 경쟁은 곧 마케팅 비용을 태우는 결과를 낳았고, 아무리 많은 가입자수를 유치하더라도 영업적자를 벗어나기 어려운 모순에 빠졌다.

이같은 상황을 설명해주는 문구가 ‘PCS폰 공짜시대’다. 20만원에서 10만원 가량 떨어진 휴대폰 가격은 공짜 수준까지 떨어졌다. 게다가 가입에 대한 편법이 횡행했으나 반대로 해지는 어렵게 조작했다. 정보통신부가 나서 약관 개정을 말할 정도였다.

즉, 외형적 성장의 이면에는 제살깍기식 출혈경쟁으로 인한 경영지속가능성을 훼손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업계에 따르면 당시 PCS 3사의 적자폭은 약 4천억원이 이르렀다. 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되는 1천만이 넘는 가입자가 이동통신을 사용해도 적자가 지속되는 악순환이 계속된 셈이다.

치열한 마케팅 전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광고, 그 중에서도 CF 광고를 들 수 있다. 당대 인기스타가 등장하는 CF 광고만이 TV뿐만 아니라 각 매체를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다.

일선에서는 사기 행각이 만연하면서 소비자 피해가 양산됐다. PCS 사업자의 상호나 상표를 도용해 싼 값에 PCS를 넘겨준다는 조건으로 유료 쿠폰을 발행해 미리 입금한 금액을 가지고 잠적하는 행태까지 발생했다. 정식 가입점과 불법 가입점을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도 생겼다. 고객이 피해를 입히는 경우도 있다. 이동통신을 마음껏 사용하고 도주하는 외국인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이동통신사의 경쟁이 무조건 악순환을 끼친 것은 아니다. 시장 경쟁에 따라 통신비는 계속해서 인하됐기 때문. 이전에는 비용 부담 때문에 휴대폰을 쓰기가 어려웠다면 보조금으로 인해 문턱이 낮아진 단말기 가격과 보다 저렴해진 요금제, 각종 부가서비스들이 강화되면서 1인 1휴대폰 시대를 앞당겼다.

문제는 경제적으로 통신비를 부담할 수 없는 계층까지 부추겼다는 것. 1998년 6월만하더라도 체납자 크게 증가했다. 그 수준이 전체 매출액의 10%에 달할 정도였다. 통신비를 내지 못한 가입자가 무려 84만명. 전체 가입자의 10%를 육박했다. 그 중에서도 요금미납에 따라 서비스가 정지된 가입자는 70만명에 이르렀다.

◆ 끊임없는 인수합병설

가입자가 늘어도 좀처럼 적자난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재계간 인수합병설이 끊임없이 괴롭혔다.

자금난에 허덕이기는 했으나 한솔PCS는 미국 투자회사인 AIG와 캐나다 통신업체 벨 케나다(BCI) 등에게 유치받은 3천500억원, LG텔레콤은 브리티시텔레콤(VBT)으로부터 5억달러 규모 외자유치계약이 성사되면서 인수합병은 있을 수 없다는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이같은 통신시장 구조조정에 가시적 움직임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보통신부가 미국 컨설팅업체 부즈앨런&해밀턴에 한국통신산업의 발전방향에 대한 용역을 의뢰하는 한편, 전경련이 구조조정 논의에 PCS를 빅딜대상에 포함시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상황이 급격하게 커졌다.

물론 여론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동통신 5개 사업자 경쟁구도를 만들어낸 것이 다름 아닌 정부, 즉 정보통신부였기 때문이다. 또한 황금알을 낳는다는 계산에 따라 움직인 재계 역시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1998년 9월 28일 규제개혁위원회는 내년부터 시내전화와 유무선전화뿐만 아니라 이동통신 등의 기간통신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일반 기업체도 기간통신사 업체를 인수하거나 합병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로 결론 내렸다.

게다가 10월 13일 당시 김우중 전경련 회장(대우)이 이동통신 5개 사업자를 가리켜 과당경쟁을 벌이고 있다며 이동통신 업종을 2~3개로 통합하겠다는 의미의 발언을 하면서 시장이 더 시끄러워졌다. 김 회장은 중복 과잉 투자를 우려하면서 가급적 2사 체제로, 불가피하다면 3사 체제로 재편한다는 합의 아래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다고 언급한게 화근이었다. 일반론이라는 해명이 있기는 했으나 이동통신 사업자들의 반발이 빗발쳤다.

◆ 휴대폰 브랜드 ‘SKY’ 탄생

기간통신사업자가 늘어나자 정부는 이를 빌려 국민이 더 저렴하게 정보통신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별정통신사업을 허가했다. 말 그대로 기간통신사업자망을 임대해 서비스하는 사업자를 가리킨다. 1997년 8월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에 따라 등장한 별정통신사업자는 설비를 보유하고 재판매하는 1호, 설비는 없으나 재판매하는 2호, 구내통신 사업인 3호로 구분됐다.

대표적인 사업자가 SK텔레콤이 자본금 40억원을 들여 1998년 4월 9일 출범시킨 SK텔링크다. SK텔링크는 한국통신, 데이콤을 이어 국제전화시장에 진출했다. 미국 AT&T, 일본 KDDI 등과 전략적 제휴를 체결하고 같은해 4월 28일 정보통신부로부터 별정통신 1호와 2호 사업 등록을 완료했다. 6월 10일에는 식별번호를 부여 받았다. 이 식별번호가 ‘국제전화 00700’이다.

이동통신 사업자가 직접 단말 제조에 뛰어든 사례도 생겨났다. 이 역시도 SK텔레콤 사례로 1998년 10월 1일 출범한 SK텔레텍이 꼽힌다.

사실 SK텔레콤은 1995년 ‘MOVE21’을 선언하면서 제조업 진출을 모색했다. 이같은 바람이 가속화된 때가 1998년 초다. SK텔레콤은 기획조정실 산하 ITM(Intelligence Telecommunication Manufacturing) 전담반을 가동했다. 정보통신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남들과는 달리 더 강력한 수직계열화 작업이 필요해서다. 생산업체 위주의 단말 공급은 실상 이동통신사업자의 요구사항이 주도적일 수 없었다.

시장은 극각 반응했다. 이미 삼성과 LG, 현대 등 대기업들이 즐비한 휴대폰 제조시장에서 공급과잉과 중복투자, 수출산업 기반 붕괴 등의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정보통신부는 실정법에 위배되는 부분이 없어 규제가 불가능하다는 해석을 내놓음에 따라 SK텔레콤은 계획대로 사업을 밀어 붙였다.

마침내 SK텔레콤은 일본 교세라와 공동출자해 SK텔레텍을 세웠다. 출자 자본금은 378억원으로 SK텔레콤이 72.5%, 교세라가 27.5% 비율로 참여했다. 삼성의 애니콜, LG 싸이언, 현대 걸리버와 마찬가지로 단말 브랜드가 필요했던 SK텔레텍은 브랜드명을 ‘스카이(SKY)’로 정했다. 첫 단말은 1999년 9월 출시됐다. 명칭은 ‘IM-100’으로 폴더 단말기였다.

여담으로 스카이의 첫 단말인 IM-100은 동일한 이름으로 17년만인 2016년 6월 30일 출시된 바 있다. 무너진 팬택을 인수해 재기에 나서면서 출시된 ‘스카이 IM-100’, 일명 ‘아임백’ 스마트폰이 그 주인공이다. 다만, 초반 기세를 잇지 못하고 다시 몰락의 길을 걷게 되면서 팬택에서는 더 이상 신규 스마트폰을 볼 수 없게 됐다.

▶ 다시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목차

1편. 삐삐·카폰 이동통신을 깨우다

① '삐삐' 무선호출기(上)…청약 가입했던 시절

② '삐삐' 무선호출기(中)…‘삐삐인생' 그래도 좋다

③ '삐삐' 무선호출기(下)…’012 vs 015’ 경합과 몰락

④ '카폰' 자동차다이얼전화(上)…"나, 이런 사람이야!"

⑤ ‘카폰’ 자동차다이얼전화(下)…’쌍안테나' 역사 속으로

2편. 1세대 통신(1G)

⑥ 삼통사 비긴즈

⑦ 삼통사 경쟁의 서막

⑧ 이동전화 첫 상용화, ‘호돌이’의 추억

➈ 이동통신 100만 가입자 시대 열렸다

⑩ 100년 통신독점 깨지다…'한국통신 vs 데이콤’

3편. 제2이동통신사 大戰

⑪ 제2이통사 大戰 발발…시련의 연속 체신부

⑫ 제2이통사 경쟁율 6:1…겨울부터 뜨거웠다

⑭ ‘선경·포철·코오롱’ 각축전…제2이통사 확정

⑮ 제2이통사 7일만에 ‘불발’…정치, 경제를 압도했다

⑯ 2차 제2이통사 선정 발표…판 흔든 정부·춤추는 기업

⑰ 최종현 선경회장 뚝심 통했다…’제1이통사’ 민간 탄생

⑱ 신세기통신 출범…1·2 이통사 민간 ‘경합’

4편. CDMA 세계 최초 상용화

⑲ ‘라붐’ 속 한 장면…2G CDMA 첫 항해 시작

⑳ 2G CDMA "가보자 vs 안된다"…해결사 등판

㉑ CDMA 예비시험 통과했지만…상용시험 무거운 ‘첫걸음’

㉒ 한국통신·데이콤 ‘TDMA’ vs 한국이통·신세기 ‘CDMA’

㉓ 한국이동통신 도박 통했다…PCS 표준 CDMA 확정

㉔ ‘디지털·스피드 011’ 탄생…세계 최초 CDMA 쾌거

㉕ ‘파워 디지털 017’ 탄생…신세기통신 CDMA 상용화

5편. 이동통신 춘추전국시대 개막

㉖ 제3 이동통신사 찾아라…新 PCS 선정 개막

㉗ ‘LG텔레콤 vs 에버넷’…‘한솔PCS vs 글로텔 vs 그린텔’

㉘ PCS 사업자 확정…‘한국통신·LG·한솔’

㉙ ‘016’ 한국통신프리텔·‘018’ 한솔PCS·‘019’ LG텔레콤

㉚ ‘PCS 경합’…64세 어르신도 번지점프 했다

㉛ 이동통신 5사 ‘각자도생’…춘추전국시대 개막

6편. 이동통신 혼돈의 세기말

/김문기 기자(moo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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