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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아가씨'의 탈주를 그리다(인터뷰)


"'아가씨' 같은 영화 나오기까지, 용기 있는 시도들 많았다"

(이 기사에는 영화 '아가씨'의 결말과 관련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권혜림기자] 여성과 여성의 사랑이 이야기의 주요 골자인 영화를, 국내 최대 투자배급사를 통해, 100억 원이 넘는 제작비를 들여, 그것도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으로 찍어 내놓을 수 있는 감독은 아마 충무로에 단 한 명, 박찬욱 뿐일 것이다.

바탕이 된 원작 소설이 한국 독자들에게도 사랑받은 작품이긴 했지만 이를 스크린에 옮기는 작업이 만만한 일이었을 리 없다. 때로 인권에 대한 시각이 정치적 올바름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통용되는 사회이지만, 여전히 동성애에 폐쇄적인 곳이 한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의 새 영화 '아가씨'(감독 박찬욱, 제작 모호필름, 용필름)는 한국 영화에서 자극적 소재로서의 동성애가 아닌, 서사의 중심으로서의 동성애를 재현하는 것이 결코 흥행을 등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지난 1일 개봉한 '아가씨'는 개봉 10일 째인 지난 10일 누적 관객 273만여 명을 기록하며 관객몰이를 이어가고 있다. 동성애를 중심에 둔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로서는 고무적인 흥행이다.

영화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된 귀족 아가씨 히데코(김민희 분)와 아가씨의 재산을 노리는 백작(하정우 분), 그리고 백작에게 거래를 제안받은 하녀 숙희(김태리 분)와 아가씨의 후견인(조진웅 분)까지, 돈과 마음을 뺏기 위해 서로 속고 속이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외로운 아가씨 히데코는 어느날 그의 일상에 발을 들인 하녀 숙희와의 관계를 통해 저택 바깥 세상으로의 탈주를 시도하게 된다. 오랜 세월 '낭독'이라는 학대를 일삼아온 후견인 이모부도, 히데코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나타난 백작도, 두 사람이 이루는 뜨겁고 긴밀한 사랑의 연대에 훼방꾼이 되지 못한다. '아가씨'가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해석되기에 적합한 영화라는 사실도 히데코와 숙희의 이런 관계성에 기인한다.

한국 영화계에서 이런 메시지의 상업 영화가 빛을 볼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그에 더해 한국영화로서 역대 최다 국가에 판권을 판매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박찬욱 감독에게 물었다. 그는 "사랑의 승리,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이 통한 것 같다"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서 쾌락을 얻는 것에 대해 주저하지 않는 모습이 정당하고 아름답지 않나. 그런 걸 볼 때 느껴지는 즐거움이 분명 있는 것 같고, 그것이 통한 것 같다"고 답했다.

"'아가씨'같은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데에는 그에 앞선 많은 시도가 있었어요. 논란 속에서나마 자꾸 시도가 되고, 사람들이 자꾸 이야기하고, 그것이 익숙해지고, 그러니까 이런 큰 투자사에서 돈도 대고 큰 스타들도 출연하고 그럴 수 있었던 거겠죠. 앞선 시도들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런 용기있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죠. 아방가르드라는 것은 용감한 사람들이 이슈를 만들며 치고 나가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저 같은 상업 감독들은 그 다음을 따라가 그 결실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죠."

'아가씨'를 두고 여성 해방의 메시지를 읽는 관객들을 대신해, 그에 대한 감독의 해설을 부탁했다. 박 감독은 "두 여성이라고 봐도 좋고, 두 약자라 봐도 좋다"며 "하층계급의 범죄 조직 출신 고아 소녀 숙희와 비록 식민지시대의 일본인이지만 지배자라고 볼 수는 없는, 불쌍한 고아인데다 정신적 학대를 당해 온 약자 히데코의 이야기 아닌가"라고 설명했다.

"히데코의 경우, 아무리 거액의 상속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소용이 없어요. 제일 멀리 가본 곳이 뒷동산인, 한심해 보일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죠. 두 약자, 두 여성이 사랑의 힘으로 억압을 뚫고 손을 잡은 채 담장을 넘어가는 거예요. 비록 낮은 담이지만, 심리적인 장벽이 너무 높기 때문에 몇 미터의 교도소 담장보다 더 넘기 힘든 담이죠. 그것을 결국 넘어 멀리 떠나가는, 탈주를 하며 자유를 찾는 이야기예요. 그것은 해방이고 독립이기도 하죠. 자신의 욕망이 뭔지 깨닫는, 욕망 충족의 쾌락을 서슴없이 추구하는 그런 결말을 냈죠. 히데코도 숙희도 무조건 선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크게 봤을 때 선악구도가 분명한 영화예요. 권선징악이 확실하고요. 그런 면에서 저의 이전 영화들과는 다른 것 같아요."

이하 박찬욱 감독과 일문일답

-역대 박 감독의 영화 중 가장 많은 웃음을 담은 영화인 것 같다. 미리 강조했던 '아기자기함'이 살아있는 영화라는 평이 많다.

"이 영화가 웃기다고 한다면, 나는 섭섭하다. 그 전 영화들에도 내 나름대로는 많은 유머가 있었다. 당시엔 사람들이 잘 반응을 안 했는데(웃음)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이 웃더라. '박쥐'나 '올드보이'나, 두 번째 보는 관객들은 뭐든 많이 웃었다. '공동경비구역 JSA'나 '친절한 금자씨' 등 다 웃을 수 있는 영화인데 워낙 폭력과 결합돼 있으니 망설이다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엔 폭력이 덜해서 웃을 수 있던 것 같다.

내가 정말 웃기다고 생각하는 장면은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유족을 연기한 배우 오광록이 혼자만 흉기가 없이 나타나지 않나. 옆 사람이 칼을 빌려줄지 묻는데, '저야 뭐' 하면서 가방에서 도끼를 꺼내 조립한다. 나는 그게 웃기다.(웃음)"

-특히 하정우가 등장할 때마다 관객들의 웃음이 자주 터졌다. 하정우라는 배우를 이 역에 기용한 것이 이런 효과를 염두에 둬서인지도 궁금했다.

"극 중 백작은 자기가 철저한 플랜을 짜서 모든 것을 디자인했다고 생각하는, 알고 보니 그래놓고 당하는 '허당' 아닌가. 두 여자끼리 사랑에 빠진 것도 눈치를 못 채고, 결국 죽어 가면서야 노 젓고 갈 때 둘이 손을 잡고 어깨에 기대던 것을 회상하며 '그래서 그랬나' 하는, 그런 멍청함이 있는 사람이다. 마초처럼 숙희의 손을 자신의 사타구니에 비비는데, 결국 그런 모욕이나 당하고 말이다. 어리숙하고 허술한 그런 면이 하정우를 통해 잘 표현됐다. 그렇게 돼야, 허술한 구석이 있어야, 이 사람의 찌질함이라든지, 사악함 혹은 비겁함이 더 잘 사는 것 같다. 그냥 완벽한 악당이라면, 진짜 첫 눈에 봐도 시종일관 사악한 사람이라면 그런 게 재밌게 살지 않는다. 어느 정도 매력이 있고 인간적이고 정이 가고 그러다가 찌질함이 툭툭 튀어나올 때 관객이 더 실망하고 당황하게 되는 것 같다."

-원작의 결말에는 두 여성이 몰랐던 출생의 비밀이 드러난다. 서사의 큰 줄기 중 하나인데, 각색을 하며 과감하게 이를 삭제한 이유도 궁금하다.

"소설 속 출생의 비밀을 비롯해 과거에 벌어진 이야기들은 원작의 배경과 관련이 있다. 원작자는 빅토리아 시대의 통속 소설들을 연구했고, 당시의 분위기로 이야기를 쓰느라 그런 요소들을 거침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그 소설의 재미이기도 했다. 현대 소설에선 잘 쓰지 않는 우연적 설정을 거침없이 쓸 수 있던 배경이었을 것이다. 읽을 때는 참 그런 점이 재밌었지만 영화로 옮길 때는 이야기가 다르다. 더군다나 한국 영화고, 관객이 모두 원작을 읽고 오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 대신 그 자리에 내가 넣으려 한 것은 좀 더 스릴러적인 요소가 강해지는 내용이었다. 만일 많은 관객이 원작을 읽고 왔다면 제일 큰 반전을 이미 알고 오는 것 아닌가. 영화가 그 이상 다른 재미가 없다면 곤란하지 않나. 원작을 읽고 왔어도 또 한 번 놀랄 수 있는 게 필요했다. 원작을 읽으며 '이렇게 풀리면 좋겠다'라고 상상한 것도 있었다. 알고보니 여자들끼리 또 짰고, 모든 것을 조종한다 여기며 잘난체하던 백작이 그러기는커녕 비참하게 선물처럼 포장, 배송돼서 죽는 내용이 얼마나 통쾌할까 생각했다."

-어딘지 의뭉스러운 히데코 캐릭터는 원작과도 닮아있는데, 숙희 역은 원작에서와 결이 달라보인다. 특히 여러 장면을 통해 숙희를 모성애 강한 인물로 그린 이유는 무엇인가.

"두 사람이 다 고아이고, 그것을 확인했을 때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 면이 있었을 것이다. 숙희는 고아로 성장하며 아기들을 키우는데서 보람을 느꼈다. 젖을 먹이고 싶다고도 하고, 아가씨의 몸종이나 하녀 역을 한다는 것에 대해 고되고 굴욕적이라 생각하는 반면 좋은 면도 있다고 느끼는 인물이다. 모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히데코의 옷을 벗겨줄 때 '이 많은 단추들은 다 나 좋으라고 달렸지'라는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 숙희는 아기 씻기고 먹이듯 하며 히데코와 정을 쌓아간다. 사실 하녀의 신분은 아가씨의 아래에 있는데도, 그런 마음으로 보는 순간 숙희는 자신을 더 우월한 존재로, 아가씨를 보살피는 존재로 정체화한다. 둘은 그러면서 대등해지는 것이다.

성역할의 고정관념이라는 면에서는, 숙희의 경우 모성이 있는 모습을 보면 여성적이지만 어떤 면에선 남성적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두 인물 모두 남성성과 여성성, 소위 '여성적이다' 혹은 '남성적이다'라고 말하는 기질을 다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 나는 '무엇이 여성적인 것인가'라는 생각을 한다. 보살펴주고 씻기고 먹이려는 마음이 여성적인가? 남자라고 그런 마음을 갖지 말란 법이 없는 것 아닌가. 서재에서 책을 파괴하거나 담장을 넘을 때 돕는 장면에서는 숙희가 리드를 하고 능동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을 남성적 가치로 보는 이가 있을지 몰라도 여자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나. 고정관념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싶었다. 히데코는 여성적 인물로 보이지만, 남장을 하는 사람은 히데코다."

-칸국제영화제 기자회견 당시 일부 국내 관객들 사이에서 논란이 됐던 답에 대해서도 묻고 싶다. '일본이 좋아서 진심으로 친일파가 된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는 대답을 시대가 지닌 역사성을 외면하는 말로 파악한 이들도 있었다.

"그건 영화를 보면 사라질 이야기인 것 같다. 영화를 보면 그 시대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이 분명 있다고, 아주 많이 들어있다고 느낄 것이다. 예를 들어 '진심으로 원해 친일을 한 친일파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는 말이 친일파를 이해한다거나 용서한다는 이야기와는 다른 것이다. 나는 오히려 이권을 따려고 친일을 하는 것보다 더 무섭고 위험하고, 심지어 더 변태적인 존재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본다면 아무도 그런 비판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진심으로 친일을 하는 자발적인 친일파, 친일파를 넘어서 그냥 일본인이 되려 하는 그런 사람으로부터 벗어나고, 그런 사람을 망가뜨리면서, 파괴하면서 끝나는 이야기이니까. '아가씨'가 항일영화까지는 아니어도 그런 사람, 세력, 사상과 싸우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극 중 히데코가 '현실에선 억지로 하는 걸 좋아하는 여자는 없다'는 대사를 던지는 장면은, 여성 관객으로서 통쾌했지만 여성 문제에 있어 소위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함'을 의식한 대목으로도 들렸다.

"물론 'PC함'도 중요하지만, 드라마에서 극적으로 통쾌하지 않나. 숙희가 백작에게 '애기 장난감 같다'는 대사를 하는 장면도 그랬다. 숙희는 거리낌없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출신을 지녔고, 백작 정도의 무례하고 거친 행동 따위는 우스운 인물이기도 했다."

-단편 연출을 비롯해 박찬경 감독과 협업하기도 했던 비상업적 작업들에 대한 계획은?

"당분간은 안하려고 한다. '스토커' 다음에 '아가씨'까지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가 그런 걸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이다.(웃음) '금방 하나 끝내면 되겠지'라며 하는데 막상 시작하면 또 몇 달이 훌쩍 지나가버린다. 몇 편을 하고 나면 2~3년이 확 가버린다. 차기작은 미국 영화로, '도끼(Ax)'가 될 예정이다. 현재 투자 협의 단계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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