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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13' 이야기…지금 가장 그리운 이름, 박지성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13번 달고 '한국의 자랑'으로 우뚝

[조이뉴스24 김동현기자] 한국 축구가 위기에 빠졌다는 여론이 팽배하다.

축구 행정과 그라운드 안의 문제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그것도 동시에 불거진 것은 한국 축구사상 처음 있는 일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만큼 한국 축구에 대한 위기 의식이 무척 팽배하다.

축구 실력이 떨어져 위기에 봉착했다는 이야기는 비단 지금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2002 국제축구연맹(FIFA) 한일월드컵 직후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이 이끌었던 한국 축구국가대표팀은 베트남이나 오만과 같은, 당시만 해도 아시아 지역 약체로 평가받았던 상대들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다. ''쇼크''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의 충격적인 패배였다.

2006 독일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에선 지금도 FIFA 랭킹 최후순위인 몰디브와 비기기까지 했다. 코엘류 뿐만 아니라 조 본프레레, 핌 베어백 그리고 무수한 국내 감독에 이르기까지 2002 월드컵 이후 한국 축구는 늘 위기와 함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여론이 더욱 거센 것은 단순히 실력의 부족 때문만은 아니다. 국가대표로서의 자긍심 내지는 자존심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팬들을 등돌리게 만들고 있다. 공을 빼앗기면 득달같이 달려들고, 수비진과의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 즉 경기에서의 의욕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럴때마다 한 사람의 이름이 거론된다.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등번호 13번을 달고 뛰었던, 그러면서도 국가대표로늘 최선을 다했던 한국 축구의 전설적인 존재. 바로 박지성이다.

◆7·21번 하지만 가장 기억에 선명한 13번

그는 프로에 지명받지 못해 명지대로 진학한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그렇다고 그가 실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만 19세의 나이에 허정무 감독이 이끌었던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됐다. 실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국가대표로서 그의 이력은 너무나 화려하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시작으로 2002 한일월드컵부터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국가대항전에서 그는 맹활약을 펼쳤다. A매치에서는 100경기에 나서 13골을 터뜨렸는데 이 13골이 모두 승부처에서 터졌던 골들이었다.

한일월드컵 조별예선 3차전이었던 포르투갈과 경기서 결승골을 터뜨린 후 거스 히딩크 감독의 품에 안겼던 장면이나 2010 남아공 월드컵 출정식이었던 한일전에서 골을 터뜨리고 유유히 산책하듯 세리머니를 펼친 장면, 남아공 월드컵 그리스와 조별예선 첫 경기에서 골을 넣고 양팔을 휘젓는 장면 등은 아직까지도 팬들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국가대표에서의 존재감이 커져갈수록 그의 등번호도 바뀌었다. 시드니올림픽 당시 2번을 달았던 그는 2002 한일 월드컵에선 21번을 달았다. 이후 7번을 달고 주장 완장까지 차면서 등번호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줬다.

7번은 그에게 있어 생소한 번호는 아니다. 그의 첫 프로 커리어였던 일본 프로축구 J리그의 교토 퍼플 상가(현 교토 상가)에서 갓 20살을 넘긴 그에게 등번호 7번을 줬기 때문. 그는 이 등번호를 달고 일왕배에서 우승을 견인하는 등 교토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 PSV 에인트호번에서도 이 번호를 달고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를 누볐다. 21번도 국가대표에서 오랜 기간 사용했기 때문에 팬들에겐 제법 익숙하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이었던 번호는 역시 13번이다. 그는 2005년 PSV를 떠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면서 이 번호를 받았다. 그리고 13번을 달고 그는 한국 축구는 물론 잉글리스 프리미어리그 아시아 선수의 역사를 새로 썼다. 2011~2012시즌까지 리그와 컵대회를 모두 포함해 205경기에 나서 27골을 터뜨렸다. 리버풀, 아스널, 첼시 등 굵직굵직한 강호들을 상대로 멋진 골을 뽑아내면서 하이라이트 필름을 만들어낸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의 활약에 프리미어리그는 단숨에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 컨텐츠 중 하나로 급부상했고 스포츠 소비 문화 행태까지 바꿨다. 스포츠스타로서 지닐 수 있는 파급력의 최고봉을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퀸스파크레인저스(QPR)로 이적하면서 등번호를 7번으로 바꿔 달았고 2013~2014시즌 친정인 PSV로 임대를 가면서 생소한 번호인 33번을 달기도 했지만 가장 빛난 것은 역시 등번호 13번을 달고 뛰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이었다.

◆명성보다 앞섰던 열정…박지성을 그리워하는 이유

지금 한국 축구가 그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대한민국 역사상 그가 축구를 제일 잘했기 때문이다.

흔히 박지성을 두고 '세 개의 심장'이라는 표현을 쓴다. 엄청난 체력을 지녔다는 뜻에서 붙인 별명이다. 하지만 단순히 체력만 좋은 선수는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체력에 단순해보이지만 상대 수비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기술을 더했다.

커리어 초창기 수비적인 포지션을 보다가 점차 전방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체득한 것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축구 지능이 한국 축구사에서 손꼽을 정도로 높은 선수였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웨인 루니, 카를로스 테베스 등 한 시대를 풍미하는 공격수들 틈바구니 속에서 박지성을 하나의 카드로 선택한 것도 이러한 기술과 지능 때문이었다. 역습 상황, 볼이 없는 상황에서의 그의 움직임은 예술적이었다. 그가 프리미어리그에서, 그리고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발판이기도 하다.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열정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었던 그는 국가대표에서 늘 선봉장이었다. 박지성이라는 이름과 존재 하나에 온 국민이 기대를 걸었다. 부담감이 차고 넘치는 상황에서도 그는 언제나 한국을 위해 헌신했다.

특히 그는 축구선수로선 치명적인 무릎 수술을 두 번이나 했다. 2003년 우측 무릎 연골 반월판 제거 수술을 했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던 2007년에도 무릎 연골 재생 수술을 받았다. 2013년에도 같은 부위를 다쳤던 전례가 있다.

그럼에도 그는 열과 성을 다했다. 부상 이후 운동 능력이 저하되기 마련이지만 그는 열정과 축구지능으로 커버했다. 국가대표로도 헌신했고 그 결과 한국 국민들이 사랑한 축구스타로 남을 수 있었다.

그는 FIFA 마스터 코스를 수료, 축구행정가로서 제2의 삶을 준비하고 있다. 그와 함께 FIFA 마스터코스 수업을 들은 한 동료는 박지성에 대해 "엄청나게 바빠보이는데도 수업에도 늘 열성적이었다"고 평가했다. 붉은색 유니폼 등번호 13번의 주인공은 이제 그라운드 위에서 볼 수 없지만 행정가로서 한국 축구를 바꿔나갈 박지성의 모습을 기대해볼 때다. 13번의 또 다른 도전이 시작됐다.

조이뉴스24 김동현기자 miggy@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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